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모 카츠히로 (문단 편집) === 만화가 === [[미야기현]] 토메군(현 토메시) 하사마쵸 출신[* [[사이보그 009]], [[가면라이더(초대)|가면라이더]]로 유명한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같은 고등학교의 선후배 사이고,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아라키 히로히코]]도 미야기현 출신이다.]으로 현립 사누마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73년 [[후타바샤]]의 <주간 만화액션>에서 데뷔했다. 만화를 처음 그리게 된 계기는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만화가 입문〉이라는 책을 읽고나서다. 중학생 시절까지 만화 습작을 그렸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이지 라이더]]》, 《[[내일을 향해 쏴라]]》 등을 보고 충격을 받고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이후 실사영화에 심취해서 만화를 그리는 것은 그만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일러스트]]를 그려서 대충 먹고 살고 싶었지만, 어쩌다보니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화가 생활 초반에는 아무 생각없이 그리고 싶은 거 그려서 잡지에 단편 투고하는 식이었는데,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만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어릴 적 읽고 좋아하던 만화에 대해 다시 읽어보고 이런 만화를 내 방식과 내 스타일대로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좋아하고 존경하는 만화가의 작품을 오마주한 초능력을 소재로 한 SF만화 3부작을 그렸는데, 〈Fire-ball〉([[데즈카 오사무]])(1979, 50페이지, [[후타바샤]]), 〈동몽〉([[이시노모리 쇼타로]])(1980, 134+100페이지. [[후타바샤]]), 〈[[AKIRA]]〉([[요코야마 미츠테루]])(1982-1990, 2천페이지 이상. [[코단샤]])였다. 파이어볼의 경우는 50페이지로 스토리라고 할 만한 것은 아직 전개도 못한 채 분위기만 잡고 끝난 불연소한 미완성작이었고, 동몽도 마음에 안 들어서 나중에 단행본으로 낼 때 100페이지를 추가했는데, AKIRA의 경우는 중소출판사 [[후타바샤]]가 아닌 대기업 코단샤([[강담사]])의 청년대상 만화 잡지에서는 가장 판매량이 많은 [[영 매거진]] 편집부측에서 먼저 SF 액션 만화를 연재해달라고 의뢰가 왔고 원고 분량도 원하는 만큼 그릴 수 있도록 보장을 한다고해서 처음부터 장기 연재작 장편이 되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진 한 편의 실사영화를 보는듯한 구성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만화 전편의 전개를 구상한 스토리 노트를 만들기도 했다. AKIRA가 만화잡지 연재작에서 흔히 발생하는 인기가 있으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게 질질 늘어지지도 않고, 그 때 그 때 [[클리프행어]]식으로 어떤 사건의 에피소드의 나열이 아닌 이유는 이 때문이다. || [[파일:i오토모 카츠히로171.jpg|width=200]] || || 오토모 카츠히로 초기 그림체 || 오토모 카츠히로의 초중반기(1973년에서 1979년까지) 만화는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의 영향을 받은, 비주류 변두리 소외층의 청년들의 삶의 애환을 다루거나, 다소 황당무계하면서 진지한 사회현실의 부조리를 그린 지극히 마이너 감성의 청년 대상의 [[극화]]스러운 내용이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은 컬트처럼 숭배하며 찾아보며 좋아했지만, 일반적인 대중 만화의 주소비층인 소년 소녀들의 취향과는 억만 광년 동떨어진 그림체와 스토리라서 아는 사람만 알고 즐기는 비주류 비인기 작가였다.(그리고 2020년까지도 애니메이션 연출과 감독을 한 작품이 대중적으로 흥행에서 히트를 한 적은 거의 없고, 여전히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면 오토모 카츠히로의 작가적 반골정신은 여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림체에서도 기존의 주류였던 데즈카 오사무의 동글동글 만화체가 데포르메화를 거친 전형적인 만화식 작화였다면 오토모는 미야야 카즈히코(宮谷一彦)의 영향을 받아 만화적 과장을 배제하고 가급적이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에 주력하였다. 사실 이러한 방법론은 [[극화]]파가 더 먼저지만 극화파도 어디까지나 데즈카식보다 더 세밀하게 그리는 것이었지 오토모처럼 철저하게 묘사하지는 않았다.[* 오토모는 ‘실제 일본인은 일본 만화에 그려지는 것처럼 눈이 크고 다리가 길고 몸매가 좋은 것이 아니잖아?’라는 식으로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기존의 일본 만화 스타일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다. 그래서 [[AKIRA]] 이전의 마이너리그 시절 작품에서 오토모는 작은 눈에 평평한 얼굴, 다리가 짧은 하반신의 일본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렸다. 여성의 나체로 자주 그렸는데, 섹스 어필하는 커다란 젖가슴이 아니라 납작한 빈유를 가진 지극히 평범한 현실적인 몸매의 여성을 그렸다. 만화의 주인공이라면 서양인의 얼굴을 하는 것이 당연시 되던, 그리고 지금도 그런 얼굴이 인기가 있는 것에 대한 철저한 [[안티테제]]를 제시했다.] 여기에 더불어 오토모는 프랑스 만화가 필명 [[장 앙리 가스통 지로|뫼비우스]](본명 [[장 앙리 가스통 지로]])의 영향을 받아서 복잡한 화면 구성과 세밀한 배경묘사, 팬터치에 의지하지 않고 균일한 선을 치밀하게 그려넣는 독특한 화풍을 선보였다. 오토모 본인 말로는, 자신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데즈카나 이시노모리의 동글동글 만화체 시대는 끝났고, [[극화]] 전성기였는데 출판사에서도 극화체를 주문하고 그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히 [[프랑스-벨기에 만화]] 방드 데시네(Bande dessinée)를 접하고는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나가는(目から鱗が落ちる)" [[컬쳐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오토모의 이러한 작화는 80년대 초반 타카노 후미코(高野文子)[* 1979년 단편 절대안전 면도칼로 데뷔한 여성 만화가. 오토모와 반대로 간단하지만 미려하게 그려낸 그림체와 서정적이면서도 독창적인 내용과 연출로 인기를 끌었다. [[마스다 미리]], [[나나난 키리코]] 같은 일본 여성 만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애니메이터 [[안도 마사시]]가 열렬한 팬으로 유명하다.]와 함께 '뉴웨이브 망가'의 기수로 불리우며 이후의 만화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만화계는 데즈카 전과 데즈카 후, 그리고 오토모 후로 크게 3가지 시기로 나뉜다고 일컬어지기도 할 정도다. 실제로 데즈카도 오토모의 작화를 보고 많은 충격을 받은 것 같다. 데즈카 오사무가 "나는 뎃상이 서툴다.", "자신의 만화는 기호다.[* 데즈카 오사무를 비롯한 기존 만화가들은 얼굴 표정이라든가 감정 표현이 마치 미리 정해져 있는 여러 스탬프 도장에서 골라서 눌러 찍듯이 [[이모티콘]]같은 그림으로 진행한다는 비판을 들었다.]" 등의 자조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오토모가 등장하고 부터다. 이는 애초에 데즈카가 만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림을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람이라고 보았던 것과도 관련된 문제이다. 그런데 질투가 심한 데즈카 오사무가 오토모 카츠히로와 만난 자리에서 "나도 자네 그림체로 똑같이 그릴 수 있다"고 허세를 떨었다는 에피소드는 일본 만화계에서는 유명한 일화다. 작화 스타일의 모방자/폴로워는 [[바나나피쉬]]를 그린 요시다 아키미와 훗날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유명한 [[콘 사토시]]가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콘 사토시는 대학생 시절 오토모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어시스턴트를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시로 마사무네]]도 본인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림체 스타일이 닮았다는 말을 듣는다. 오토모의 방식은 손이 많이 가고 상당한 작화 실력과 작업량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의 화풍이 만화계에서 주류로 정착하지는 않았다. 연재를 시작할 때부터 상당한 인기를 얻어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자마자 많이 팔릴 것이라는 보장이 없으면, AKIRA처럼 그 고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 어시스턴트를 여러 명이나 고용하면서 연재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이제 막 잡지 연재를 시작해서 어시스턴트가 1명이나 2명인 신인급 만화가한테는 벅찬 옵션이고, 기존 인기 만화가는 본인 스타일로 그리면 됐으니까 굳이 오토모를 따라 할 이유는 없었다. 혼자서 배경도 인물도 전부 그리는 그림에 자신이 있는 예술성 지향/작가성이 강한 수 많은 만화가 지망생에게는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핑퐁]]의 [[마츠모토 타이요]]나 [[해수의 아이]]의 이가라시 다이스케라든가) 만화 출판사의 편집부가 요즘엔 이런 그림체와 이런 내용이 유행하니까 잘 팔릴려면 이런 그림체 이런 내용으로 그리라고 권하는 것은 무시하고, 만화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 스타일로, 그리고 싶은 내용을 그리는 [[작가주의]] 정신으로 그렸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모델 케이스가 오토모 카츠히로였다. 이렇게 일본 만화사에 있어 획기적인 발전과 변화를 이끈 인물로 만화가로서는 [[데즈카 오사무]]에 비견될 만큼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만화가는 1996년에 은퇴했다. 본인이 영상에 대한 욕심이 더 많기 때문에 만화가로서 활동하는 것에 큰 관심을 잃었다. 이후로는 장편은 없고 드문드문 단편을 내놓는 정도인데, 2019년엔 '기분은 이미 전쟁' 3편을 내놓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